법률용어 속 일본식 잔재, 이제는 바꿔갈 때


1990년대 초 법과대학에 입학해 처음 접한 “민법총칙” 강의는 참으로 낯설고 어려웠습니다.

법이란 인간 사회의 질서를 다루는 논리적 체계라고 배웠지만 현실에서 마주한 법률용어는 마치 한국어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간주’, ‘기판력’, ‘선의와 악의’ 같은 표현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었고 이를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법조계에서는 이러한 언어의 이질성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법은 원래 어렵다고들 하고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일제강점기 시절에 도입된 일본식 법체계의 흔적과 용어의 잔재도 그 이유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본식 법률용어의 뿌리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의 행정·사법 제도는 일본의 법률체계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대표적인 법령인 ‘조선민사령’, ‘조선형사령’ 등은 일본 메이지 민법과 형법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사용된 법률용어 역시 일본식 번역어가 주류를 이뤘습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새로운 헌법과 법률을 제정했지만 해방 직후의 혼란과 인력 부족 속에서 기존의 일본식 용어까지 개정할 여력은 없었습니다.

결국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법률용어들은 법학 교육과 실무에 그대로 전승되었고 오늘날에도 법령, 판례, 교과서 등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법 속에 살아있는 일본식 표현들


가장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바로 ‘선의(善意)’와 ‘악의(惡意)’입니다.

일상적 생활 속에서 우리가 쓰는 선의는 ‘착한 마음’, 악의는 ‘나쁜 의도’를 뜻하지만 법률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법에서 선의란 ‘모르는 상태’, 악의란 ‘알고 있는 상태’를 뜻하므로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독일 법률 개념을 일본어로 번역한 표현을 다시 한국어로 가져오면서 생긴 이중 왜곡의 대표 사례입니다.

이 외에도 “등기”, “가등기”, “구상권”, “기판력”등의 예들도 있습니다.

각 “등록”, “임시등기”, “변상청구권”, “판결구속력”등으로 바꿔 써도 될 용어입니다.

임의적 예시로 더 적합한 용어가 있다면 그렇게 바꿔가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하나하나 정리해 가야 합니다.

일본식 법률용어 청산
일본식 법률용어 예시와 순화 가능표현 정리표


일본식 용어가 여전히 남아있는 이유


해방된 지 80년이 지났음에도 일본식 용어가 여전히 사용되는 이유는 단순한 관습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구조적인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1. 기존 교육 및 판례의 누적

    수십 년간 축적된 법률 교육과 판례가 일본식 용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이를 변경할 경우 기존의 법적 해석과 충돌할 우려가 있습니다.


  2. 개념의 추상성과 전문성

    법률 용어는 고도의 전문성과 추상적 개념을 담고 있어 일상적인 단어로 쉽게 치환하기 어렵고 자칫 의미의 축소나 왜곡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3. 보수적인 법조 문화

    법체계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중시하는 법조계에서는 단어 하나를 바꾸는 것도 큰 부담으로 여겨 전체 문장을 수정하고 해석을 바꾸는 데에 소극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한국어 법률로 바꿔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정부기관과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법률용어의 정비와 순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 법제처는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통해 행정 및 법률용어를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 국립국어원은 ‘법률용어 정비사업’을 통해 일본식 표현을 순우리말로 대체하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제안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등기 → 등록’, ‘청구권 → 요구권’, ‘기판력 → 확정효’ 등 일부 용어는 시범적으로 일부 법령에 도입되었으나 모든 법령과 교육과정을 동시에 개편하기에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합니다.

법은 국민의 삶과 가장 밀접한 공적 규범입니다.

그렇기에 법률용어는 전문가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여야 합니다.

아직도 법률 속에 살아 있는 일본식 번역어들은 이제 역사적 평가와 정비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단어 하나의 변화가 국민의 법 이해도를 높이고 법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법의 지배는 전문성뿐 아니라 국민과의 소통에서 출발합니다.

그 시작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어’부터입니다.

이제는 우리 법도 진정한 ‘독립’을 위해 국민의 언어인 한국어로 다시 써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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